강제 수용소 관련 정보
1939년 영국 정부의 나치 강제수용소 백서에서
아래에 소개하는 자료는 1939년 가을에 영국 정부가 발표한 히트라의 독일 나치스 강제 수용소의 실태를 세계로 폭로한 백서의 일부분 이다. 1939년 9월에 히트라가 폴란드를 침공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어서 영국정부가 발표한 것이다. 1938년즈음 부헨발트 수용소의 실태가 생생하게 고발되어 있다. 이것을 NO FENCE의 홈페이지에 소개하는 이유는 복한 산 속의 강제소용소와 잘 비슷하기 때문이다. 북한 산 속의 수용소에서 발 해진 소리와 착각하는 내용이다. 실은 나치스의 강제수용소는 아우슈비츠에 대표되는 절멸수용소와 노예노동을 시키는 강제수용소의 2종류가 있으며 영국정부가 1939년에 폭로한 것은 후자의 수용소 이었다. 절멸수용소는 1942년에 등장한다. 우리는 나치스의 수용소를 가스실에서 죽여가는 절멸수용소로 흔히 이해 하기 쉽지만 일을 시켜 죽여가는 강제수용소도 있었다는 것을 이 영국정부 백서는 알리고 있다. 북한형의 강제수용소도 독일에 존재 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북한의 갱제수용소의 하루 빨리 폐절을 위해 활용하고 싶다고 생각해서 여기에 소개하는 대로이다. 나치스의 강제수용소와의 유사성은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명백하다. 우리의 인식을 넓게 해, 나치스의 수용소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운동의 고리를 펼쳐 가기 위해서도, 1939년 영국 정부 백서는 각국어로 번역될 필요가 있다. 여기에 번역한 것은 5분의 1이다. 백서는 다음의 책에 거두어 지고 있다.
”The Mark of the Swastika"(1941년、 New York)
2007년에 패이퍼 백의 복각판이 나와 있다.
유태인 그리스도교인의 증언
Z씨는 독일에서 종업원 3명의 작은 장사를 하고 있었다. 1938년 6월 아무 이유도 예고도 없이 베를린 가두에서 검거 되었다. 체포 명령도 없이 (그리고 나중에도 아무런 영장도 없었다). 알렉선더 프레이스 형무소에 끌려가서 이미 32명이나 들어가 있던 방에 집어 넣어졌다. 앉을 곳도 없을 정도로 좁았다. 밤에는 교대로 앉았다. 화장실 용의 물통 하나(심한 악취가 풍김). 그 곳에 이틀 체재. 누구나 먼저 경찰서에서 이력을 조사 받고 구금을 동의하는 서명을 강요 당한다. 소지하고 있던 물건은 모두 빼앗긴다. 15곳의 경찰서로 부터 약 3천명의 죄수가 모아졌다. 역까지 화물차로 옮겨진 후 목적지도 알려주지 않은 채 특별 차량에 넣어진다. 잡담 금지. 바이마르에 아침 6시 반에 도착. SS대원의 구타와 모욕으로 맞이해진다. 유태인 개 자식, 건달들아 ! 너네들을 드디어 잡았구나 등등.
3~4%가 아리아 인과 소수의 집시이다. 수용소 쥐휘관 슈나이더의 지휘 아래 화물차에 나누어진다. 한시간 반 만에 부헨발트로. 무서운 조건의 수용소이다. 앉는 곳 마다 오물과 진흙이다. 많은 수목들이 잘려저 있다. 그러나 그루터기는 그대로 여서, 거의 걷기가 불가능하다. 심장병 때문에 걸을수 없는 한 남자는 다른 수용자들 발에 붂여 끌려갔다(SS대원은 유태인과 직접 접촉하지 않는다). 그의 얼글에서 살갗이 찢어서 분간할 수 없는 정도로 변했다. (다른 예도 이와 비슷비슷하다).
350명의 신참자들은 병영의 지하실에 갇혔다(수용소 전체 합해 약 천명이 있었다). 그 곳에는 가구도 없이 짚으로 만든 자루 100장 뿐이었다. 4열로 하나의 자루에 3명씩 잔다. 서로 붙어 자도록 강요 당한다. 공간이 생기게 끔 자루 위에서 교차해 마치 정어리의 통조림과 같은 꼴이다. 등을 맞대고 잘 일은 금지되거나 곤봉으로 한번 후려쳐진다. 직접 감독의 지위에 서는 사람은 오래 있던 수용자이다. 부정한 상관들 자신 즉 프로 범죄자들이 우리와 함께 잔다. 그들의 말이 절대적인 볍율 이다.
우리들이 도착해서 지휘관의 연설이 딸린 점호가 몇시간아니 계속된다. 지휘관은 우리의 수용에 관한 모든 명령을 내린다.
《수용소의 질서》
이 곳은 교화를 위한 형무소 또는 장소가 아니다. 이 곳에는 별도의 방법이 있다. 어떠한 도망치려는 시도나 공격적 행위(단순한 이야기나 몸짓도 동일한 것으로 간주됨) 는 천 볼트의 전기 철책에 의해 저지된다. 모든 보초는 만일 누군가가 그의 라인에서 벗어난다면 경고 없이 라이플을 사용하게 되어있다. 총알 한개의 값은 12 페니히 였다. 그리고 그것이 많지도 적지도 않은 유태인 한사람의 값이었다. 이들에게는「유태의 돼지」, 「천민」, 「유태인 시다바리」, 「더러운 돼지」등의 욕설이 따랐자만 며칠이 지나면 사람들은 그에 익숙해졌다. 지휘관 대표들은 점호를 해서 관리를 지명 하였다. 첫 날은 점호와 옷 공급 (속옷 없이 군화, 바지, 상의)공급이 있었다. 옷은 맨 몸 위에 걸처졌다. 사람들은 추위에 떨었다. 부헨발트는 고지대에 있었다. 10일후 속옷이 지급 되었다.
《시간표》
3시반 기상(취침은 밤 10시). 매우 나쁜 공기와 악취. 작은 독방의 창문에서 물이 방울져 떨어진다. 4시반에 정렬. 4시45분 커피 공급. 그것도 교수대가 서있는, (채찍질을 하기 위한 참수대가 있는 광장에서 이루어진다. 이 보고 전에는SS대원 한명을 살해한 사람이 매달려 있었다. 매달려 있던 자는 고참이었던 프로 범죄자 였다. 독일에서의 보통 인사는 수용소에서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허락된 인사란 명령이 반복 되는 동안 모자는 벗고 차렷자세를 하는 것이었다. 5시30분 점호 끝. 그때까지는 딱딱한 차려자세로 선다. 병이났다고 보고된 사람들은 앞으로 나가 간격을 두고 쥐휘관의 점호를 받는다. 지휘관은 바로 모두의 면전에서 승마용 채찍으로 병 자의 얼굴을 때려서 발작(기절)에 대한 치료를 했다. 유태인은 병 들지 않는다면서. 지휘관은 의사가 봐야할 환자를 외견으로 결정했다. 병이라고 말하고 나온 사람들의 6~7%였다. 나머지는 노동대로 돌아가야 했다. 노동대 속에서 아픈 자의 구별은 없었다. 환자들은 발차기와 승마용 채찍으로 재촉 당했다.
의사는 환자를 병 아니면 발작이라고 선언했다. 후자는 밤에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벌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유태인의 병은 인정 받지 못했다. 건강이 아니라면 죽움 밖에 없었다. 점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계속 서 있지를 못했다. 이미 재난 속에 있던 동료들이 한패들에 의해 강하게 떠받쳐야 했다. 비록 완전히 쇠약하고 있다 할지라도 정면에서 대열은 완전하게 보여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일이란은 건설 되어야 할 도로에서 떨어진 곳에서 15분 동안 돌을 부수는 작업 이었다. 그곳은 수용소의 바깥쪽 이었지만 전기 철책 안 이었다. 도망 치려는 시도는 있었다. 그러나 모두 총격을 당하고 끝났다. 많은 경우가 사살 당하기 위해 도망 치는 척함으로서 고통을 끝내려는 것이었다. 도처에 보초가 배치 되었다. 목팔 환자나 탈장 환자 (때때로 벨트가 없으면 탈장이 됨)등의 불구자 집단은 경비병의 의사에 의해 많은 양의 돌을 옮겨야 했다. 그런 일에 젼혀 적하지 않은 70세 이상의 노인들도 포함 되어 있었다. 한번은 경비병이 병으로 쇠약 해져가는 남자를 총검으로 찔렀다. 이것이 반복 되자 그 남자는 죽자는 생각으로 철책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사살 되었다.
도로건설을 위해 15분 동안 돌 부수는 작업은 일 할수 있는 자들에게는 오전중 12번 내지 15번 오후에는 8차례 행해졌다. 불구자에게는 그 반 이었다. 건상자들은 4명씩 많은 돌을 시른 손수레를 끌어야 했다. 그것도 자주 달려가면서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넘어진 사람은 비참했다. 실수를 한 사람은 감독에게 곤봉으로 맞았다.
경비병의 라이플의 대상이 그 뒤를 따랐다. 노동대가 전체가 감독으로 부터의 처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물을 마시는 것은 특히 금지 되어 있었다. 병이 났다고 거짓 보고하는 것, 또 작업을 방해하는 행위에 대한 벌은 채찍이었다. 11시 30분에 점심 휴식이 있었다(가끔 점심 식사 없이 저녁 7시 까지 일 시키는 일도 있었다). 다시 12시 30분 부터 3시 반까지 작업. 오후 4시 점호. 점호는 통상 5시반 까지 이어졌다. 유태인들중 많는 사람은 밤 10시까지 노동. 어떻게 해서 비 아리아인과 유태인을 구별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리아인에서 잘 못골라내진 비 아리아인은 가엾었다.
유태인은 다윗의 십자 표시가 들어간 것을 몸에 걸쳐야 했다. 적색은 프로 범죄자. 흑 색은 실업자. 자색은 성서 광신자. 사람들은 프로 범죄자라는 서명을 할 것을 강요 당하고 그것은 카드 목록 기입 된다(카드 뒷면에는 본인의 실제의 직업이 기입 된다). 진술서의 서명을 거부한 자는 비참하다. 노란 색은 유태인 표시 였다. 그것은 다른 거에 추가 되었다.
채찍 질은 오후 점호 때에 행해졌다. 해당자는 앞으로 나오게 된다. 이미 정해져 있는 벌이 소리 내어 읽힌다. 통상 벌은 둔부에 25번 채찍질을 당하는 것이다. 좌우에서 채찍을 든 경비병이 한다. 수용자는 판에 묶인다. 만일 비명 소리를 내면 35번으로 늘어난다. 경비병은 온 힘을 다한다. 때로는 공중으로 뛰어 올라 팔에 힘을 더한다. 채찍 질이 없는 날이 수일 동안 이어진다. 그리고 횟수는 2번 내지 10번 이다. 채찍질을 당한 후에 점호가 끝날 때까지 벽을 향해 차려 자세로 서 있어야 한다. 그리고 위생관이 와서 연고를 상처에 바른다.
다른 처벌은 팔을 뒤로 굽히게 하고 팔을 위로 잡아 당겨서 지상 3미터(10피트) 위에 매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휘관이 특별히 마이크를 써가며 지휘한다. 이 벌들을 행하기 위해 특별히 사람이 공용 된다. 그들은 따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매다는 것은 10시간 내지 12시간 이어진다. 그것도 공중 면전에서. 매달기의 다른 형태는 다리를 지상에서 띄워 수갑이 채워진 채로 나뭇가지를 끌어안게 하는 것인데, 다리는 지상에서 떠러지지만 보다 약한 처벌로 간주 된다. SS대원은 그걸 언제든지 행사 할수 있다.
저녁에는 자유시간은 없다. 그러나 하는 일은 낯 시간 보다 쉽다. 국가 경찰에 의한 시험도 있지만 난폭한 것은 없다. 만약 금지가 되지 않으면 2주에 한번 집에 편지를 쓴다. 물론 상황을 사실대로 쓸수는 없다. 가족은 진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Z씨는 수용소에서 14일 동안만 있었던 유일한 사람 이다. 그러나 짧은 동안 이러났던 개별적 사건들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었다. 벽을 보고3시간 동안 서 있으라고 명령을 받은 남자가 3시간 끝나 갈 즈음 불가피하게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을 해서 조금 몸을 굽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해진 위치는 시종일관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한 경비병이 수용자가 똑바로 있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수용자를 잡아 그의 머리를 반복해서 돌 벽에 내리쳤다. (돌은 날카로운 모서리가 있었다. ) 피가 튀어 벽면을 따라 흘렀다 분출하고 벽의 위를 따라 흘러갔다. 그 순간 경비병은 새로운 분노에 사로잡혔다. 「이 돼지가. 벽을 더럽혔어」. 그는 남자를 땅에 내동댕치고 용서 없이 그를 때렸다. Z씨는 그 남자가 죽을 거라고 생각 했었다. 그러나 그는 되 살아 났다.
보다 심한 경우는 아내에게서 애정이 넘치는 편지를 받은 어떤 중년의경우 이다. 그는 교양이 있는 예민한 사람 이었다. 자기 제어의 한도를 유지 할수 없어서 흑독하게 요구 당한 것을 언제나 바깥으로 표출했다. 그리고 지고서는 신음 소리를 냈다. 그때문에 그는 나무에 얽매였고 14시간 동안이나 방치됐다. 그는 의식을 잃었다. 두 경비병이 치나갔다. 아 그는 벌써 죽었구나. 그들은 그를 풀어 땅 위에 내던졌다. 그리고 그의 몸 위에 뛰어 올라가 그들의 무거운 신발로 짓밟았다. 그가 희미하게 움직였다. 아, 아직 안죽었구나. Z씨가 그곳를 지나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그 남자를 봤다. 그의 가슴과 얼굴은 응고한 피 덩어리 였다. 그의 눈은 부어서 보라색 이었다. 게다가 그는 정신이 이상해졌다. 점호 때는 양쪽에서 사람들이 그를 지탱 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머리는 앞으로 늘어지고 몸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밤에 그는 갑자기 거칠게 소리를 치며 뛰쳐나가서 통조림 처럼 누어 있는 동료들의 몸을 밟고 도망 가려고 했다. 그때 명령이 내려졌다. 그 후 양촉 사람들을 그가 조용히 있도록 하는 책임을 졌다. 만일 그가 또 소리 치기 시작 한다면 둘은 25번 채찍을 맛는다고.
수용소에 고용된 SS대원들은 그 거의 그를 위해서 특별한 훈련을 받은 17세 부터 20세 내지의 아주 젋은 자 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아주 잔인하고 가학적 이었기 때문에 Z씨 에게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항상 신기할 정도 이었다. 그들은 고문을 가하는 것을 즐기고 있는 듯 했다. 한 예로 수용자의 얼굴을 지푸라기로 간질인다. 수용자가 간지러워 얼굴을 확 당기는 순간 그에게 무서운 일격을 가한다. 경비병의 가학적인 놀이는 변호사였던 어떤 노인에 대한 그들의 취급에서 볼수가 있다. 그 유태인의 모습은 특히 주의를 끌어기 때문에 그는 담벼락 위에서 기념비 격으로 6시간 에서 8시간 동안 서 있게 되었다. 모든 통행인이 이 장난에 진심으로 웃었다. 또 다른 때에는 경비병이 그에게 물이 뜨거운지 물어봐서 변호사가 동의하자 물통 10배 분의 물이 그 얼글에 끼얹어졌다.
Z씨자신은 수용소에서 비교적 잘 지냈다. 그는 그것을 기도 덕분이라고 했다. 그 기도에 의해 겁을 극복할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각자에게 부과된 불합리한 요구를 완수하려면 그리고 중노동과 다른 신체적 고통을 비틀거리거나 뒷 걸음질 치지 않고 견뎌내려면 많은 육체적인 힘과 담력이 필요하다. 약함의 표시는 분명하게 경비병들의 가학적인 본능을 자극한다. 그래서 사람이 그들의 다리 높이 가까이에게 주저앉아있으면 그들은 습관적으로 사람들의 얼굴을 찬다. Z씨는 항상 하나님에게 희생자들이 죽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왜냐 하면 하나의 고문은 곧잘 달은 고문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희생자들을 사살 하는 것이 그들의 생을 허락 하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고 보다 자비로울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실질적인 목적이 파괴 당한 상태에서 그들에게 사는 것이란 길게 늘어진 무한의 번민을 가져올 뿐이었기에.
수용소는 1만명의 수용자가 있었다. 그의 약 반정도가 유태인과 소수의 성서 탐구자들 이었다. 매일 많은 죽음이 있었다.
Z씨는 수용소에서 14일 동안 지낸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주의 준비가 갖추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석방된 몇 안 되는 인원 중 한사람 이었다. 그러나 몸에 상처 자국이 있는 수용자는 석방은 불가능 했다.
그들은 단단히 협박 당했다. 그들이 수용소 안에서 보거나 경험 한것들을 한마디라도 발설하면 곧바로 데리고 돌아와진다고. Z씨는 나라를 떠나기 전에 소지품을 모두 팔아 치우기 위해 몇주간의 체제 허가를 요구했다. 그러나 그가 다시 체포 되는것이 확실해 졌다. 독일인 목사가 항구 에서 영국인 영사와 같이 그의 케이스를 변호하여 Z씨는 그 나라를 떠나기 위한 비자를 얻었다. 차를 팔고 남미 까지의 표를 구했다. 그러나 사업은 정리할수 밖에 없었으며 1933년 이래 구입한 모든 소유물에 부과된 100%의 세금은 그의 재산(고가의 전문적인 도구등)의 거의 대부분을 가지고 가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결국 현금으로 10마르크 밖에 소지하지 못하였다.
Z씨는 전쟁 (제1차 세계대전)을 싸운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참호안의 생활은 강제 수용소의 생활과 비교하면 요양원 같은 것이었다.





